한국의 코로나 3차 대유행

한국의 코로나 3차 대유행도 정점을 지난 듯하다. 하고 싶은 말은 몇 가지 있지만, 우선 다시 소강 상태로 돌아가는 모양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위는 한국, 미국, 일본을 함께 둔 그래프. 그나마 로그화시키면 얼추 함께 볼 만한 그래프가 뜬다.

그런데 일본의 신기한 점은 확진자는 몇 배가 되는 데 비해(한국이 일일 신규 확진자 천 명 대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3천 명을 넘었고 현재는 6천 명씩 매일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사망자 수는 그에 비하면 훨씬 적다는 점. 일각에서는 요양 병원 등 고위험 클러스터 관리가 잘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던데, 한국에서도 사망자를 낮추려면 저 부분은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사리를 먹지 않고 키운다면 나무가 될까?

흥미로운 트윗을 하나 봤는데, 본 김에 적어본다. 트윗을 쓴 분은 최근 호주 브리즈번에 방문해 이 나무고사리를 보시고 놀란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먹는 고사리를 키운다고 해서 이런 고사리가 되진 않는다. 보통 한국에서 식용 고사리로 사용되는 종은 Pteridium aquilinum인데, 기껏 다 자라도 1m다. 그런데 사진 속의 고사리는 나무고사리로, 나무고비목(Cyatheales)에 속해 고란초목(Polypodiales)인 한국에서 주로 먹는 고사리와는 목 단위에서 차이가 나게 된다.

참고로 나무고비목과 고란초목은 고사리류에 속하는데, 계통분기도를 보면 가장 최근에 갈라져 나온 종류이다. (물론 고사리가 언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지질학적 수준에서 최근이다) 또한 현존하는 고사리 종류 중 대부분이 고란초목에 속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키아테아과와 딕소니아과의 구분. 출처는 아래 표기.

나무고사리는 대개 키아테아과(Cyatheaceae)와 딕소니아과(Dicksoniaceae)에 속해 있다. (다른 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 두 과가 지배적이다.) 둘을 구분하는 법은 꼬투리/털의 존재와 포자낭의 모양이다.

사진만 보고서 쉽사리 구분하긴 어렵지만, 해당 트윗을 쓴 분이 최근 호주 브리즈번에 방문했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Dicksonia antarctica일 듯하다. 이 딕소니아 종은 호주 남동권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나무고사리 중 하나기도 하다.

위에서 보면 저런 모습이지만, 옆에서 보면 사실 기둥이 있고 기둥 끝에서 줄기가 뻗어나오는 구조이다. (나무고사리들이 보통 이런 모양으로 생겼다). 이 종은 다 자라면 보통 4-5m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의 시선에서 궁금한 건 역시 식용 여부가 아닐 수 없는데(…) 기둥 위쪽과 새순을 먹을 수는 있다고 한다. 특히 기둥에 전분이 많다고.

옛 기록에 따르면 호주 원주민도 먹었다고 한다. 새순은 크기가 큰데 데쳐먹으면 아스파라거스나 샐러리, 무와 비슷한 식감이라는 얘기가 있다. 직접 먹어본 사람의 후기에 따르면 기둥 윗면이 제일 먹을 만하다고 한다. 여튼 한국처럼 나물로 먹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일단 딕소니아과답게 털이 무척 많다. 이걸 제대로 처리하기 전에는 쉽게 먹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런 Dicksonia antarctica는 호주에서 주로 자라는 종이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당연히 국내에서 자생하는 것은 아니고, 경기도의 국립수목원 열대식물자원연구센터 열대온실에서 키우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개방은 안 한 것으로 보이지만, 웹진에서 이렇게 다룬 적이 있다.

2021. 1. 12. 추가

한 분의 말씀에 따르면 새순 모양 때문에 오히려 키아테아과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고. 이 경우에는 역시 퀸즐랜드에서 흔한 Alsophila australis나 Sphaeropteris cooperi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참고한 자료

  1. 로빈 C. 모란. (2010). 양치식물의 자연사(김태영 옮김. p. 121). 지오북.
  2. Dicksonia antarctica.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Dicksonia_antarctica)
  3. Sphaeropteris cooperi.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Sphaeropteris_cooperi)
  4. Alsophila_australis.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Alsophila_australis)

M1 맥의 ‘프린터 대기열’이 안 열릴 때 해결 방법

나는 집에서 Canon G7090 복합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M1 맥북 프로로 교체한 이후 ‘프린트 대기열’이 안 열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프린터는 무선 랜을 이용해 연결되어 있고, 설치할 때도 캐논 홈페이지에서 드라이버를 받은 게 아니라 맥에 내장된 기능을 이용하여 설치했다.

‘프린트 대기열’의 모습

프린트 대기열은 인쇄할 작업 목록을 관리해 주는데(취소, 순서 변경도 가능), 문서를 인쇄할 때 자동으로 뜨기도 하고, [시스템 환경설정 → 프린터 및 스캐너]로 들어가서 ‘프린터 대기열 열기’를 눌러도 뜬다.

그런데 평소 인쇄 작업이 많아서 취소/변경을 할 일이 많은데, 프린트 대기열이 안 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만 겪는 문제는 아닐 듯해 찾아 보니 M1 Mac Can’t Open Print Queue이라는 글이 있었다. 글쓴이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는데, 아래의 방법을 시도해 보니 자신이 갖고 있는 브라더와 HP 프린터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한다.

해결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파인더 → option(⌥) 키 누른 채로 ‘이동’ 클릭 → ‘라이브러리’ 폴더 이동
  2. ‘Printers’ 폴더 클릭 후, 자신의 프린터가 보이면 command(⌘) 키와 영문 I키 클릭(혹은 우클릭 후 ‘정보 가져오기’)
  3. 클릭 해제 되어있는 ‘Rosetta를 사용하여 열기’를 클릭해 체크

댓글에 보니 여러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해결이 된 듯한데, 나는 클릭하고 다시 인쇄를 하고, 맥을 재시동하고, 프린터를 지웠다 다시 설치해도 변화가 없었다. 혹시 한번 실행해 주면 괜찮을까 싶어서 눌러보기도 하고, 우클릭 → 열기도 해봤는데 권한이 없다는 안내가 뜨면서 안 됐다. 그런데 Rosetta를 사용하여 여는 게 해결책이라면 맥 내장 드라이버를 이용해 설치하지 말고 아예 제조사에서 드라이버를 직접 받아서 설치하면 설치 과정에서 자동으로 Rosetta 설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캐논 다운로드 센터 홈페이지에서 최신 드라이버를 받아서 안내에 따라 설치하니 제대로 잘 된다. 중간에 프린터 추가를 하고 진행하라는 안내가 뜨는데, 이때는 시스템 환경설정 → 프린터 및 스캐너로 들어가서 프린터 목록 아래의 + 버튼을 눌러서 프린터가 잡히면 추가하면 된다.

제대로 잘 설치된 모습

이렇게 설치하고 나니 아까 원래 해결책처럼 정보를 확인했을 때 Rosetta 옵션이 체크된 채로 설치된다. 인쇄할 때 프린터 대기열도 잘 뜨고, 프린터 및 스캐너 설정 페이지에서 ‘프린터 대기열 열기’를 눌러도 잘 뜬다. 내장 기능으로 설치할 때와 권한 설정도 차이가 있는 건지, 폴더에 들어가서 직접 열기를 눌러도 아까와 달리 잘 열린다.

혹시 프린터 대기열 기능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계신 분이라면 도움이 될까 해서 써본다.

블로그 재이전 완료

한번 구글 블로거로 갔지만 결국 다시 워드프레스로 돌아왔고, 여기서 계속 머무를 듯하다. 구글 블로거로 가서 편한 점은 우선 기본적으로 세팅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워드프레스는 처음 설치부터 해서 플러그인까지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블로거는 기본적인 것들을 자동으로 해주니까. 특히 SSL 인증서 https 설정은 워드프레스에서 아주 골치아팠다.

그런데 AWS Lightsail로 서버를 설치할 때 내장된 Bitnami에 bncert bot이라는 게 있어서 https 설정이 굉장히 간편하다는 글을 읽었고, 그 김에 다시 워드프레스로 오게 되었다. 사실 블로거를 쓰면서 여러 불만이 있었는데, 테마 관련해서 깔끔한 게 없고 카테고리를 만들 수가 없다는 거였다. 태그를 잘 사용하면 해결된다는 거였는데, 내게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또 각주 사용도 문제였다. 각주를 기본으로 지원하지 않는 탓에 주석을 달려면 HTML의 앵커 기능을 사용해서 복잡하게 하지 않는 이상은 힘들었다. 이건 사실 웹에서 각주라는 기능 자체가 안 맞다는 판단일 수는 있는데, 플러그인 하나 깔면 깔끔하게 지원하는 워드프레스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마침 Andrew Gelman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보고 아주 깔끔해서 테마가 마음에 들었는데, 이게 또 워드프레스 테마라 마음먹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반응형 디자인을 지원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테마 버전 문제였는지 이것도 잘 지원하는 듯해서 아주 마음에 든다.

라이트 유저가 하루동안 만져본 M1 맥북 프로

미션컨트롤하는 상황

위 GIF 짤로 요약 가능하다. 아래처럼 프로그램 켠 상태.

  • 사파리 탭 33개
  • 한글 문서 3개
  • 파워포인트(50슬라이드) 하나
  • 워드 문서 1개
  • 카카오톡 / 트위터
  • 미리보기 PDF 4개
  • 음악 / 캘린더 / 메시지

이렇게 켰는데 미션 컨트롤을 켜도 아주 멈춤 없이 스무스하게 된다. GIF라 프레임이 떨어져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아무 끊김 없다.

활성 상태 보기에서 메모리 상황

메모리 상황은 위와 같다.

이렇게 해도 모든 작업이 아무 딜레이가 없고, 느려지거나 뜨거워지거나 하는 것도 없다. 이륙도 없고 배터리도 훨씬 덜 닳는다. 사파리도 탭을 왔다갔다 해도 바로바로 뜨고, 새로 사이트를 켜도 바로 뜬다. 원래 쓰던 모델은 2014-mid 맥북 프로 13인치 기본형이고 용량만 256GB으로 올린 모델이었는데,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한글 모두 잘 돌아간다. 특히 오피스는 최근에 M1 네이티브 버전도 출시됐다. 한글은 빅서 업데이트 후에 복사/붙여넣기 딜레이가 말썽이지만(인텔/M1 공통) 그나마 M1에서 딜레이가 훨씬 짧다. 다만 엑셀 고용량은 안 돌려봤고(어차피 제대로 엑셀하려면 윈도 써야 되기도 하고), R하고 Rstudio는 기본적인 패키지들은 잘 돌아간다.

딱 한 가지 불만이 있다 보면, 터치바 없던 모델을 쓰다가 처음 만나니 계속 한 박자 늦는다. 생각을 하고 볼륨이나 밝기를 조절하게 된다. 불편하긴 한데 익숙해질 거라고 믿고(…) 쓴다.

결론적으로 문서작성 위주의 라이트 유저면 램 8GB만 해도 충분할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맥북 에어로 사도 문제 없을 듯하다. 개발자나 헤비 유저가 아닌 나 같은 라이트 유저들한테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한다.

중간계급 부모와 노동계급 부모의 양육 차이: Unequal Childhood

요 며칠 사이 화제가 된 네이트 판 글은 불평등이 생성되는 장소로 가정을 주목하고, 그 주요 경로를 계급에 따라 문화자본이 전달되는 형태가 달라진다고 보는 점에서 사회학자 Annette Lareau가 쓴 책인 〈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에서 주장하는 바를 짚는 측면이 있음. 단지 개인 한탄으로 보기 어렵다.

지금은 유펜에 있는 Lareau가 미국에서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인터뷰하고 참여관찰한 결과물인데, 저자의 주장은 중산층 부모와 노동계급 부모의 양육 형태가 다르고, 이 과정에서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이 나중에 여러 공식기관(=학교 등)에서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 이걸 정리한 표가 아래와 같다.

저자 Lareau 본인이 정리한 표인데, 출처는 아래에 나와있다.

가령 중산층 부모는 아이의 시간을 굉장히 세심하게 통제해서 다양한 경험과 프로그램으로 채워넣고, 언어사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부모-자녀 사이의 논쟁과 협상이 이뤄지며, 학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사, 의사 등 전문가에게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피력하는 일을 꺼리지 않음.

이게 아이에게 자격(entitlement)에 대한 양식을 키워주는데, 반대로 노동계급 부모는 아이가 알아서 자기 시간을 보내게 냅두고, 부모-자녀의 언어 사용이 대체로 지시-수용이며 공식적인 기관과의 관계에서는 수동적이고 잘 개입하려 들지 않음. 여기서 아이가 겪는 건 제약(constraint)의 양식.

그런데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공식적인 기관들이 요구하는 규준이, 결국은 중산층 가정이 양육 과정에서 전달하고 훈련하는 문화적 논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중산층 자녀들이 이득을 얻는다는 것. 이게 결국 가정이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통로가 되는 이유이자 과정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임.

아래 글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다.

  • “흙수저 부모님은 학원이 공부하는 곳이라고만 생각해서 인강으로만 때우라고 하는데 / 학원은 10대 애들끼리 친목도 하는 곳이라는 걸 이해 못함.”
  • “나는 그때 / 자식이 학교에서 친구 문제로 스트레스 받으니까 / 이사보내 줄 수 있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음.”
  • “나도 초등학교 때 비슷한 경험 있었는데 / 부모님이 도움 안 되는 훈계만 좀 늘어놓고… / 결론적으로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만 했음.”

이게 가리키는 게 한국에서 학원 뺑뺑이가 단지 인적자본(학력)을 키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설계하고 보내는 양육방식의 차이라는 것. 또한 중산층 부모들은 언제든 공공기관에서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자세가 되어 있음. ‘일치단결된 양육’의 특성이 보이는 것. 반면 작성자의 경험은 전형적인 ‘자연스러운 성장’을 보여주는 부분. 자녀의 삶을 세심하게 통제하고 교육기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그냥 자녀가 스스로 해결하게 냅둠.

결국 통제된 방식의 양육이 오히려 자율성을 갖고 문화자본을 적절히 활용하고 다룰 줄 아는 결과를, 자연스럽게 냅두는 양육이 제약을 체화하는 결과를 낳는 아이러니. 그런 점에서 이 판 글은 한국도 어린 시절의 다양한 부분에서 문화적 차이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신호로 봐도 좋을 듯.

대체로 농업 등 1차산업이 지배하고 부모들도 똑같이 비슷하게 잘 모르고 가난하던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통해 서로 다른 계급의 부모들이 나타나고 다른 방식의 양육을 하기 시작함. 저 글은 한국에서 문화적 불평등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작동하고 있는 여러 측면을 짚어낸 글 같음.

참고해 볼 만한 자료

  1. 위에서 나온 표는 저자 본인이 내놓은 단행본인 〈Unequal Childhood〉를 직접 축약해서 실은 글에서 발췌했음. 읽어 보면 압축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기에 좋음. Lareau, Annette. “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 Social Stratification, pp.926-936.
  2. Lareau의 연구는 한국어로 번역본도 나와 있음. 에코리브르에서 나온 〈불평등한 어린 시절〉.

계달에게 준 서(贈季達序)

우리 종제(從弟) 계달이 금년 사마시(司馬試)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가 얼마 뒤 복시(覆試)에 낙방하자, 나는 한편으로 그를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축하해 주었다. 옛날 조말(曹沫)이 노(魯)나라 장수로 제(齊)나라에 세 번을 패했다가 규구(葵丘)에서 회맹(會盟)할 적에는 칼 한 자루로 만승(萬乘)의 군주를 위협하여 세 번의 패전에서 잃은 땅을 떨어진 물건 줍듯 손쉽게 회복하였는데, 그 어찌 전에는 비겁하고 뒤에는 용맹해서였겠는가. 분발하여 용기가 격발된 것이다.

분발은 용기의 길잡이이고 상실은 획득의 계기이니, 분발하지 않으면 용기를 낼 수 없고 잃지 않으면 꼭 얻으려고 노력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 종제는 한 번 잃고 분발하였으니, 이 기회에 용기를 가다듬어 반드시 얻고야 말리라고 다짐한다면 틀림없이 기대한 대로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하여 한번 낙방하면 반드시 시험관을 원망하는데, 이는 사리를 모르는 행동이다. 우리 종제의 자질로 성률(聲律)을 익혀 과거 공부를 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 요행으로 합격을 바라는 자들보다 못하겠는가마는, 치밀히 공부하여 백발백중인 이들을 따르기는 어림도 없는데, 이러고도 시험관을 탓할 수 있겠는가.

종제는 앞으로 더욱 분발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매일 경전에 힘을 쏟되, 충분히 익히고 쌓아 문장으로 드러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부가 더욱 풍부해지고 문장이 더욱 정밀해지기를 기다려서, 마치 숫돌에 갈려 날이 선 태아(太阿 보검 이름)가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된 뒤에 세상에 나가 쓴다면, 무슨 일인들 순조롭지 않겠는가.

과거 시험은 실로 작은 일이고 사마시는 그중에 더 작은 것이니, 사마시에 붙고 떨어지는 문제는 종제에게 말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활쏘기는 말단적인 기예인데도 군자는 그것을 중시하여 인자(仁者)의 법도가 된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자신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패한 원인을 자신에게 돌이켜 찾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이 시험관을 탓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고 자신만 반성할 수 있다면, 그 중시할 만한 가치가 어찌 활쏘기만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시작하여 인(仁)을 행하는 데로 나아간다면 그 행하는 방법이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吾從弟季達。發解今年司馬。旣而覆試不利。余蓋俯而弔。仰而賀也。昔曹沫爲魯將。嘗三敗於齊矣。及葵丘之會。手一劍劫萬乘。而反三戰之所喪。猶掇之也。是豈其勇怯殊哉。亦激於奮也。蓋奮者。勇之倡。失者。得之機。不奮則不鼓勇。不失則不能爲必得。今吾弟旣奮於一失矣。因是而鼓厲勇氣。期於必得。可左券契也。余視世之人。應擧一不得。則必怨有司者。是惑也。夫以吾弟治聲詩爲擧子業。何遽不若今之徼倖佹得者。而其視百發穿楊者。則不翅未至。是亦可責之有司者已乎。吾弟其自今益發憤自勵。日肆力於經籍。浸涵菀積。發之文辭。俟業益富藝益精。如太阿之發於硎而無不可剸也。而後出而試焉。將何往不利。科擧。固小事。而司馬。又其小者。其得失。本不足爲吾弟言。然以射之爲末藝而君子猶重焉。至以爲爲仁者則。則亦以不怨勝己者而反求諸己也。爲擧業者。誠能無責有司者之心。而唯己之反焉。則其可重豈猶不若射。而由是而進於爲仁。其術亦不外是矣。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섬세한 줄타기: 의사 저널리스트를 위한 윤리적 기준(A Delicate Balance: Ethical Standards for Physician-Journalists)

강서구 사건에 관한 모 의사의 글을 읽었다.

아무리 사회적 관심사안이고 공익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해도,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다루면 안 됐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극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유족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절박한 생의 순간에 의사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았던 망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인간적 품위의 문제다.

그는 서두에 공익을 위한 일이라며 변호했지만, 도대체 그 글 덕분에 어떤 공익이 증진됐는가? 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분노한 나’에 대한 전시와 통념에 기대는 허약한 비판뿐이다. 결국 인구에 남아 떠도는 것은 피해자의 참상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얼마나 잔혹하게 죽었는가 하는…

아래는 미국의사협회 의료윤리 학술지(AMA Journal of Ethics)에 실린 글이다.


[원문] Tom Linden, MD. (2011). A Delicate Balance: Ethical Standards for Physician-Journalists. Virtual Mentor, 13(7), pp. 490-493.

의사인 동시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두 종류의 전문직이 요구하는 윤리적 규준, 그것도 종종 서로 상충되곤 하는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사들이 그들의 환자들에게 “부정의하거나 위해를 끼치지 말 것”을 요구하고, 그들의 환자들의 “삶에 대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명합니다.

저널리스트들은 종종 자신이 찾아낸 비밀을 지키기보다는 반대의 행동을 취합니다—그들은 전문저널리스트회(SPJ, the 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ts)가 이르는 바와 같이 “공공 계몽”의 견지에서 그 정보와 뉴스를 다양한 청중에게 퍼뜨립니다.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저널리스트는 어떤 내용에도 우선하는 전문저널리스트회의 윤리헌장의 네 가지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진실을 추구하며 보도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그리고 책임있게 행동할 것.

이런 충돌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는 바로 의사들이 그들의 환자를 글감으로 삼을 때입니다. Awakenings과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에서, 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엮어서 흡입력 있는 서사로 만들어냈는데, 그 이야기 중 많은 것들은 의학 학술지와 The New York Review of Books나 London Review of Books와 같이 유명한 매체에 동시에 실렸습니다. 외과의사 Atul Gawande는 The New Yorker 지와 Slate 지에 일반 대중을 위해 쓰인 (나중에 그의 책 Complications에 실린) 이야기를 싣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의사가 실수할 때When Doctors Make Mistakes”에서, Gawande는 환자와 의료진을 비밀로 하기 위한 그의 주의에 대해서 썼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는 실제 일어난 일에서 (관계된 이들의 이름을 포함한) 세부내용을 약간씩 바꿔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환자와, 나 자신과, 나머지 의료진을 보호하는 선에서 최대한 실제 사건과 가깝게 기술하도록 노력했다.”

이야기꾼인가, 저널리스트인가?

어떤 이들은 Sacks와 Gawande는 이야기꾼이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고유한 시각과 견해를 보여주고 있고, 자신의 목소리나 (어떤 경우에는) 편견을 드러내는 데 있어 어떠한 핑계도 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와 같이,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또 그들의 글에 대해 독자와 편집자들에게 책임을 집니다. 2009년 The New Yorker 지에 실린, 의료비용에 있어서의 지역적 편차에 대해 다룬 Gawande의 글은 뉴욕의 Memorial Sloan-Kettering Cancer Center의 한 의사가, 그 글에 인용된 연구자가 사용된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그의 분석을 변론하기 위해서 Gawande는 The New Yorker 웹사이트에 반박에 응답했습니다.

지면 상에서 의사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이 데려오는 환자의 정체성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명성을 추구하기 위한 세부 내용들은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회색지대에 글을 밀어넣게 됩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아주 상세한 대화는 독자의 신빙성을 높입니다. 몇 년 전, 제 학생 중 한 명은 한 의사 저널리스트가 이야기 속에 삽입한 긴 단락의 대화에 의문을 표하면서 어떻게 그가 사무실에서 그와 환자가 대화한 말 하나하나를 녹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저자로부터의 답변은 난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화로부터 느껴지던 인상에 기반해 그 단락을 작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윤리적으로 봤을 때 그런 기준은 의료 사례 보고서를 위해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저널리즘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독자들은 인용된 내용이 말한 그대로 사실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전문 영역이 달라지면, 우리는 다른 기준을 요구받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 이야기를 풀어놓는 의사들은 다른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는데, 특히 — 보통 환자들의 — 얼굴을 이야기에 어떻게 넣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서 그러합니다. 제가 정신과 의사로 수련을 받고 텔레비전에 나와 의학에 관한 내용을 보도하는 커리어를 시작할 때, 저는 텔레비전에서 저를 보고 찾아온 환자와는 절대로 상담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거꾸로 보자면, 제가 수련 중 만나는 환자에 대해서는 텔레비전 보도에서 절대로 다루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쇄 매체에서 환자의 정체성을 숨기는 건 가능한 일이지만, 실루엣만 드러내거나 음성변조된 목소리나 모자이크된 얼굴은 텔레비전에서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습니다.

착취라는 유령

그 자신의 환자를 이야기에서 사용하는 것은 설사 환자가 자신의 정보를 드러내거나 인터뷰하는 데 동의했다 하더라도 ‘착취라는 유령’을 배회하게 하는 일입니다. 환자들은 혹시라도 진료 거부를 당하거나 전문적 서비스를 받는 데 있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싶어 의사 저널리스트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사이의 환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입니다: 의사는 의학에 관해 우월적인 지식을 갖고 있고, 그들의 환자의 사적인 내용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상처받기 쉽거나 두려워하는 이들을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사 저널리스트가 2010년 아이티에서 벌어진 지진이나 일본에서 일어난 쓰나미나 핵 발전소 사태와 같이 재난의 현장에서 보도할 때 위의 내용은 사실일 것입니다.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난 지 며칠되지 않았을 때, 미국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대부분의 뉴스 방송사 — CNN, CBS, NBC 그리고 ABC나 기타 방송사 — 에서 의사 저널리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사람들을 돕고 있었고 많은 경우 그들이 돕는 사람들에 대해서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제가 일부 의사 저널리스트들이 그들이 상대하던 취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에 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던 에세이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CNN의 수석편집자이자 부회장이던 Richard T. Griffiths는 그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 “아이티에 있었던 모든 CNN 팀과 같이, Sanjay Gupta는 세계에 전례없는 재난을 전하기 위해 저널리즘의 가장 높은 기준을 준수했습니다. 그의 의학적 전문지식은 CNN의 보도에 있어 특별한 맥락과 깊이를 더했습니다.”
  • “의사로서, Sanjay Gupta는 의료 전문직에 요구되는 가장 높은 기준을 준수했으며, 연민과 숙력을 갖고 환자를 대했습니다. 이것은 전문직업의식의 발로로서 — 의사이든 저널리스트든 간에 —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윤리적 원칙에 대한 안내

아이티 지진 사태의 여파를 보도하는 데 있어서, 의료저널리스트연합(the Association of Health Care Journalists)은 의료 통신원으로 구성된 임시 조직 — 그곳은 제가 회원으로 참여한 바 있습니다 — 을 소집했는데, 이는 “비탄에 빠진 이들”을 보도함에 있어서 안내가 될 만한 원칙을 공식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품위decency는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그들이 안심하게 만들도록 재촉하지만, 통신원들은 그러한 행위로부터 영리를 추구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돕는 이들을 착취해서도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가이드라인은 동의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 저널리스트에게 도움을 받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저널리스트의 일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저널리스트가 도움을 주었다면, 그들은 이야기를 위해서 (도움을 준 사람 대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때로는 훌륭한 일이기도 하지만, 유명세가 금전적인 보상을 가져다 주는 언론 보도 환경 속에서는 저널리스트의 도움과 노력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저널리스트의 사적 이익을 높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용주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며, 그것은 공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느 현장에서든 환자에 대한 착취를 피하기 위해서는, 의사 저널리스트는 반드시 다음의 규정들을 준수해야 합니다. 먼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겁박 등이 없이 행해진 동의가 있지 않는 이상 여러분 자신의 환자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삼가십시오. 두 번째, 여러분이 쓴 이야기가 그 글에 등장할 환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지 예민하게 살피십시오. 만약 환자가 프로필을 제공하는 데 동의하더라도, 다른 이야기를 사용하기를 고려해 보십시오. 세 번째, 절대로 여러분의 환자 중 독자, 청취자, 혹은 시청자가 그 개인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드러내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의료저널리스트연합이 비탄에 빠진 이들을 도우는 일에 관해 온라인으로 선언한 바와 같이, “이득이나 명예를 위해 취약한 이들을 착취하지 마십시오.”

몸값보다 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More Trouble Than They’re Worth)

나중에 Robert Sutton 교수는 이 글을 쓰고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 입어 책까지 쓰게 된다. 책 제목은 “또라이 제로 조직”이라는 아주 화끈한 제목인데, 아쉽게도 현재는 절판되었다. 책의 원제는 더 놀라운데, 무려 “The No Asshole Rule”이다. 책 내용은 평이하고 재밌는 편이니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원문] Sutton, R. (2004.2.). “More Trouble Than They’re Worth”. Breakthrough Ideas for 2004. Harvard Business Review.

많은 경영자들은 조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간단한 규칙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실제로 그걸 제대로 받아적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좆 같은 새끼 금지” 규칙을 적용합니다. 거친 단어를 사용한 데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 아마 여러분은 그들은 폭군, 불량배, 야비한 새끼, 잔인한 자식, 혹은 파괴적인 자기성애자 같은 단어로 부르고 싶어할 것 같은데, 물론 저도 종종 그렇게 합니다. 어떤 행동과학자들은 그들을 심리적 학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들을 “물리적 접촉을 제외한, 적대적인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행동의 지속적인 표출”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 차갑고 명료한 정의는 그놈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곤 하는 분노와 혐오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쨌든 간에 저는 이런 악의에 가득차서 남들을 괴롭히는 놈들을 볼 때마다, (‘* 같은 새끼’보다) 더 좋은 말을 못 찾겠습니다.

15년 전, 저는 그들을 금지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처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한 학과의 교수진 모임에서, 학과장님은 어느 후보를 새로운 교수로 채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토의를 주재하고 계셨습니다. 한 교수가 다른 학교에 있었던 꽤 알려진 연구자를 고용하는 것을 제안했을 때, 다른 사람이 그 제안에 즉각적으로 토를 달았습니다. “난 그 사람이 노벨상을 탔든 말았든 상관 안 하는데, 어떤 * 같은 놈이 와서 우리 모임을 망치는 것은 반대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원칙(?)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수를 뽑을지 말지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규칙은 그 학과를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죠.

그 이후로, 저는 비슷한 규칙을 적용하는 다양한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카고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로펌인 McDermott, Will & Emery는 다른 곳에 비해서 더 일하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혹은 적어도 받았고), 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회사에 꽤 이익이 되었습니다. 경력에 대한 정보를 주는 인터넷 업체인 Vault가 한 조사에 따르면, McDermott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비서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면 안 됩니다”와 같은 좆 같은 새끼 금지 규칙을 지키기로는 유서깊은 곳이라고 합니다 — 물론 그 조사는 최근에 그 회사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그 규칙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말 역시 잊지 않았습니다만. 비슷하게, 피닉스에 있는 한 포럼은 하계 인턴에게 문서화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우리 Snell & Wilmer는 ‘멍청이 금지 규칙’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최종 평가에 여러분이 주변의 다른 인턴이나 변호사, 그리고 직원들과 얼마나 잘 지내는가에 관한 능력이 포함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두 달 전쯤 한 소프트웨어 회사의 회장은 제게 다음과 같이 귀띔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개새끼도 뽑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일깨웁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은 여러분에게 이 규칙이 주로 직원을 뽑는 데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직 문화와, 그 조직에서 어떤 사람이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가에 관한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나 밖으로 나가기를 갈망하는 개새끼가 한 명 씩은 있습니다. 차이는 바로 어떤 조직은 사람들이(특히 “성과가 좋은 스타 직원”) 이렇게 한 사람을 괴롭히고, 또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별 문제 없이 넘어가게 하거나, 혹은 심지어 그 일에 대해서 상을 주면서 그런 짓을 허용합니다. 다른 곳은 단순하게 그 놈이 얼마나 힘이 있고 회사에 이익이 되든 간에 상관없이 그런 행동에 관용을 배풀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제 딸이 학교를 옮겼을 때를 기억합니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 그녀는 제게 “옛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주변 사람들을 잘 대해야 해요’라고 말했을 때는 진짜 잘 대해주라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새 학교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어떤 조직들은 “에이스(stars)”들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도록 내버려 둡니다. 반면 다른 조직들은 그것을 내버려 두지 않을 테고요.

물론 저는 이 규칙에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만 악마처럼 대하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성인군자처럼 대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심지어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지 유용한 테스트를 찾았습니다. 첫 번째 테스트는 바로 이것입니다: 좆 같은 놈처럼 보이는 그 인간과 대화를 하고 난 후에, 사람들이 그 사람들 때문에 무시 당하고, 우울한 상태에 빠지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극적인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두 번째 테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놈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나, 드물지만 만약 한다면, 자기보다도 강한 사람에게도 자기의 독(毒)을 내뿜습니까? 정말이지, 어떤 사람이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을 대할 때 얼마나 차이가 생기는가는 제가 아는 한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저는 이상해 보이는 역설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만약 회사에서 “좆 같은 놈은 한 명만” 규칙을 시행한다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일탈과 규칙 위반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만약 나쁜 비행을 계속 저지르는 사람이 한 명 있을 때 — 또 이 사람이 조직 내부에서 퇴짜를 맞고, 다른 사람이 꺼리고, 제재를 받게될 거라고 예상이 될 때 — 다른 모든 사람들은 명시적인 규칙과 암묵적인 규칙 모두를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한다고 합니다. 저는 일부러 표시가 나게 좆 같은 놈을 고용하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수로 그런 놈들을 고용했거나, 심지어는 한 두 명 정도는 승진까지 시켜준 조직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보여줬던 셈이죠.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이 고용되거나, 심지어는 높은 직위나 정교수가 될 때까지 자신들의 어두운 면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죠. 그러니 미리 계획적으로 그런 놈들을 뽑을 필요 없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좆 같은 놈들을 안 고용하는 것을 목표로 잡으면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한 두 놈은 얻어걸릴 수 있을 겁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전지적 개인은 없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도 13년이 되었다고 한다.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이 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날이 학교 졸업식이었기 때문이다. 졸업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가던 길에 지하철 사고의 소식을 어른들의 수군거림으로부터 알게 됐던 일이 기억에 선하다.

참사1는 끔찍했다. 굳이 세계 2위의 철도 사고라거나, 한국 5위의 참사라는 무서운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직까지도 돌아다니는 그때의 문자 메시지라던가, 전화 통화 기록을 보면 몸서리 쳐진다. 오늘 네이버 검색창에 ‘대구 지하철 참사’라고 치니 가장 먼저 뜨는 기사의 제목이 “대구지하철 참사 13주기 추모행사… 2003년 2월18일, 멈춰버린 13년”인 건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00disaster1.jpg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 반대편 차선에서 중앙로역에 들어온 1080호 전동차의 한 객차 안에서 연기가 차오르자 승객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불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당시 이 전동차에 탄 사람들은 ‘잠시 기다리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을 들은 뒤 전동차 출발이나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사진을 언론 등에 제공한 류호정씨는 이 전동차를 타고 있다가 두 컷의 사진을 찍은 뒤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으나 연기에 질식돼 병원으로 옮겨졌다.”(한겨레신문, 2003년 2월19일치) 사진/ 류호정

흔히 우리는 사고를 ‘운용자’들의 ‘실수’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제로 사고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운용자들을 신성한 법과 상식의 이름으로 단죄하고, ‘이단자’로 규정하고 격리하는 건 통쾌한 일이지만… 그것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올바른 방향인지는 종종 의문이 든다.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결국 처벌과 비난의 화살을 홀몸으로 맞는 건 전체 시스템을 관망하고 관리하는 고위층이 아니라 시스템의 말초적인 부분에서 운용하는 말단 하위층인 경우가 많았다.2

우리는 사고를 돌이켜 볼 때 “어떻게 인간이 저럴수가”라는 표현을 종종 쓰고는 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모습은, 언론에서 ‘1080호의 기관사가 마스터키를 뽑아 출입문이 닫히면서 피해를 키웠다’는 장면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핵심적인’ 살인마로 규정하며 “어떻게 불이 난 상황에서 저렇게 할 수 있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당 사고를 조사한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조금은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

  1. 안심행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전동차에 타고 있던 방화범이 휘발유에 라이터를 켜 불을 붙임.
  2. 불이 방화범의 옷으로 옮겨 붙자 방화범이 휘발유통이 든 가방을 전동차 바닥에 던져 불이 전동차 벽면과 천장 등에 옮겨 붙음.
  3. 전동차 내부가 급속히 타들어 갔고, 많은 양의 검은 연기와 유독성 가스가 분출되어 승강장과 지하 1~2층의 대합실 등에 급속히 확산.
  4. 승객들은 주출입구 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
  5. 1079열차 기관사는 소화기로 불을 끄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화재발생 사실을 종합사령실에 보고하지 않은 채 역시 밖으로 대피.
  6. 종합사령실 기계설비사령 주컴퓨터에 중앙로역 화재경보 문구가 뜨고 경보음이 울렸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확인하지 못하였음.
  7. 1079열차의 40대 남자승객이 중앙로역 전동차 안에서 화재가 발생되었다는 내용을 소방본부 종합사령실에 최초 신고, 이후 역시 밖으로 탈출한 승객들과 전동차 안에 갇힌 승객들과 휴대전화 통화를 한 가족 등이 현장의 상황을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 신고.
  8.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는 삼덕파출소 등 8개 출동대에 출동명령.
  9. 중앙로역 역무원이 종합사령실에 “중앙로역 실제 화재입니다. 전혀 앞이 분간이 안 됩니다. 신고 좀 부탁드립니다.”라며 중앙로역 화재사실을 신고하였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119 신고를 하지 않았음.
  10. 1080열차가 대구역에서 중앙로역으로 출발.
  11. 중앙로역 역무원이 초기 소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부 직원이 승객 대피 유도.
  12. 종합사령실 운전사령이 전체 열차에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하여 운전하여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가 발생됐습니다.”라고 열차무선 전체 호출을 통하여 통보.
  13. 대곡행 1080열차가 이미 검은 연기가 가득 차 있던 중앙로역 승강장에 도착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림.
  14.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음.
  15. 전동차 전원이 끊어짐에 따라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됨.
  16. 1080열차 기관사가 운전사령에게 열차무선으로 “엉망입니다. 빠른 조치바랍니다.”라며 적정한 지시를 내려주도록 요구.
  17. 운전사령은 상황판단을 하지 못한 채 “대기하고 승객들에게 안내 방송하라”고 지시하여 1080열차 기관사는 “잠시 후 출발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고 안내방송.
  18. 중부소방서 서문로파출소 소방대원 현장 도착 및 인명구조 시작.
  19. 중앙로역 역무원이 화재 사실을 119 신고.
  20. 1080열차 기관사가 종합사령실에 연락하여 승객 대피 여부를 결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던 중 전동차에 잠시 전력이 공급되어 출발시도.
  21.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어 기관사가 출발을 시도하면 전력이 다시 끊기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승객대피 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됨.
  22. 1080열차 기관사는 전동차가 곧 출발할 예정이므로 전동차 안에 대기하도록 승객들에게 방송.
  23. 1079열차에서 1080열차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
  24. 종합사령실과 1080열차간 열차무선 통화 두절.
  25. 종합사령실에서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중앙로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1080열차 기관사에게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고 지시.
  26. 1080열차 기관사는 출입문을 개방하고 승객대피 안내방송 실시하나, 일부 차량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았고 승객들이 수동으로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전동차 안에 갇혀 있게 됨.
  27. 소방파출소 및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활동 시작.
  28.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 복현파출소 등 16개 파출소 달서구조대, 동부구급구조대 등에 구급차와 물탱크차 출동 요청.
  29. 지하 1층과 지하 2층에서 인명구조 계속 실시.
  30. 1080열차 기관사는 운전사령의 “전동차 판(팬터그래프의 줄임말) 내리고 차 죽이고 가라”는 지시를 받고 승객들의 안전과 대피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전동차의 마스터키를 뽑아 역사출입구를 통해 탈출.

대구광역시. (2005).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사고백서. pp. 53-55.

위의 30번까지의 일이 불과 20분도 안 되는 시간 속에 벌어졌다. 좋은 식당에 가서 주문하면 식사가 나올 때 정도까지의 시간이다. 실제로 1080열차 기관사가 문제를 인식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요구된 시간은 십여 분이다. 종합사령실에서 “화재는 났지만 조심하고 (멈추지 말고) 역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고 이 정도의 화재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전동차에 불이 옮겨붙고 좌석을 비롯해서 시설들이 불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타기 시작했지만, 전동차의 전력 공급은 끊겼다가 다시 들어왔다가 하는 상황에서(이는 전력 문제로 인한 자동 차단기가 ‘정상’ 작동한 결과로 드러났다.) 상황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고가 끝나고 사람들은 전지적인 시점에서 사고를 바라봤지만, 위의 29가지의 ‘사건’ 중에서 1080열차의 기관사가 관여하거나 알 수 있었던 사건은 14개 정도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화재가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그중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훗날 조사에서 드러난 것에 따르면, 기관사 교육에서 ‘좌석에는 불이 잘 붙지 않는다’3고 가르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화재는 좌석을 통해서 번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당 기관사의 판단에 영향을 끼친 직접적인 요인은 대강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좌석은 쉽게 불이 붙지 않는다(고 알고 있음).
  2. 종합사령실의 지시에 따라 운전해야 함.
  3. 역무실과의 직접적인 연락선은 없으며, 종합사령실을 통해서만 정보 습득함.
  4. 전동차의 자동 차단기(과전류가 흐르면 회로 보호를 위해 자동으로 전기를 끊고, 자동적으로 3회 동안 다시 전기 연결을 시도함.)

사실 위의 4가지 요소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좌석에 불이 붙지 않는 이상 이를 알 방법은 없으며, 평소에는 당연히 사령실의 지시에 따라 운전하는 것이 ‘안전’하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전동차를 운용하는 기관사가 역무실과 연락할 필요는 당연히 없으며, 전동차의 회로 보호를 위해서 자동차단기는 작동하는 게 안전하다.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이 엮이면서 참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화재가 난 상황에서 좌석에 불이 붙지 않는다는 정보는 큰 오류였고, 종합사령실 역시 사고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지시에 의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차라리 역무실과 연락했으면 진작에 사고의 실상을 알았겠지만 그들 사이의 직통 전화선은 없었으며, 이 상황에 ‘정상적으로’ 작동한 전동차의 자동차단기4는 기관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선택권을 축소했다.

그렇다고 기관사의 잘못이나 책임을 면제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관사로서 가지게 되는 승객 구조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른 책임은 져야 하지만, 사고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시스템의 운용자들을 ‘전지적 관찰자’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고에 ‘기여’하는 모든 운용자들과 부품들은 소설의 인물들처럼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

사고는 언제나 많은 것을 드러내 준다. 특히 대형 사고를 따라가다 보면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치부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사고 예방에서 발생과 처리와 해결, 그리고 합의까지…5 다양한 층위의 사회 구조를 겪으면서 사고가 정의되고 해결되는 방식을 보다보면 (전에 한 책에서 말한대로) 사고가 그동안 가려져 있던 ‘뒷무대(backstage)’의 장막을 활짝 열어준다는 표현에 쉽게 수긍할 수 있다.6

대형 재난을 단순히 ‘인재(운용자의 잘못)’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고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제인식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시스템 내의 행위자들의 개별적인 문제에만 집착하다보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악인을 단죄하는 것은 통쾌한 경험이나, 우리가 결국 이뤄내야 할 것은 더 나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각주

  1. 이러한 대형 재난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개념이 ‘복잡성’과 ‘연계성’이다. 예일대 사회학 교수인 찰스 페로의 책인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에 나오는 개념인데, 철도운송은 ‘단선적(비복잡성)’인 특성을 가진 ‘긴밀한 연계’로 본다. 원전과 우주탐사보다는 전체 시스템이 단순하지만, 한 번 사고가 일어나면 대처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
  2. 결국 처벌을 받고 끝난 것은 방화범과 지하철 기관사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시스템의 말단에 위치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끝나 버린 것. 혹시 데자뷰가 보이지는 않는지?
  3. 사고 이후 문제가 됐던 전동차의 내장재(좌석 등)은 불에 타지 않는 재질로 교체되었다. 참고로 원래 전동차가 이러한 저질 내장재를 썼던 이유는 무려 ‘예산 부족’이었다. 선진국에 수출되는 전동차는 17억, 서울에 운행되는 전동차는 8억이었지만, 대구 지하철은 예산을 이유로 5억을 요구한 것.
  4. 피해를 키운 요인에는 방화벽(셔터)도 있었다. 지하상가로 이어지는 주요 출입구가 방화벽이 닫혀 버린 바람에 사람들이 빠져 나오지 못한 것. 사고 이후의 조사를 보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면서 벽을 긁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 나중에 ‘지하상가의 화재를 막으려고 일부러 닫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지만, 조사 결과 방화벽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뿐이었다. 화재가 나고 자동적으로 셔터가 내려온 것.
  5. 화재신고를 받고 여러 구조 세력이 도착했지만, 지휘 체계의 부재(…)로 구조는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체계를 갖추고 시작하였다. 이는 1995년 벌어졌던 삼풍백화점 사고에서도 일어난 일이었지만, 8년이 지난 그때도 별로 달라진 바는 없었다.
  6. 그 당시 국무총리 고건 씨가 한 연설문의 내용을 되짚어 보면 섬뜩하다. “철저한 재난방지종합대책을 수립하여 국가 안전관리 체계를 확고히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사고현장의 구조/구난 지휘체계를 확립하는 등 현장대응 능력도 대폭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국정의 각 분야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겠습니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전 제일주의의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을 영령들 앞에 다짐합니다.” 글쎄…